세계의 IT 중심지인 실리콘 밸리 지역에는 애플, 구글, HP, 페이스북, NASA 연구소 등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 최고의 첨단기업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특히 실리콘 밸리의 여러지역중 쿠퍼티노(Cupertino)에는 애플 본사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데요, 쿠퍼티노라는 지명은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주 레체근교 작은 도시인 코페르티노(Copertino)에서 유래한 지명입니다.
1776년 프란치스코 수도자들이 선교의 목적으로 이곳에 정착하면서 수험생과 비행사들의 수호성인이신 이탈리아 코페르티노 출신의 성 요셉을 기념하여 붙인 지명이었습니다. 그리고 1963년 7월 24일 두 도시는 자매결연을 맺어 현재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코페르티노 성 요셉의 삶
아버지: 펠리체 데사(Felice Desa)
어머니: 프란체스키나 파나카(Franceschina Panaca)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은 1603년 6월 17일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주 레체 근교 작은 도시인 코페르티노(Copertino)의 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당시 코페르티노 백작의 성(城)지기로 일하던 아버지가 친구들의 지나친 빚보증을 서주는 바람에 채무자들에게 쫓겨 다니던 시절 그의 어머니가 마구간에 은신하던 중 성인이 태어나셨다고 전합니다.
이유는 다르지만 예수님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그도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7살때 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원인을 알 수 없는 난치병으로 곧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년간 병상에서 누워 지내야만 했었습니다.
이때 그는 어머니가 이야기해 주시는 소리를 들으며 교육을 받았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삶을 희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후에 선량하지만 무능했던 아버지로 인하여 가정을 대신 이끌어 나갔던 강한 어머니 덕택에 프란치스칸이 될 수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그의 나이 15세가 되던 해 어느 날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근처 마을 갈라토네(Galatone)에 있는 은총의 성모 마리아 성당(Oratorio di Santa Maria delle Grazie)으로 아들의 치유를 구하는 기도를 하러 갔었고, 제단의 불을 밝히는 성유를 아들의 이마에 바르는 순간 병이 완전히 치유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병에서 회복한 그는 16세가 되었을 때 구두 공방에서 구두수선을 배우며 일을 시작하였으나 적응하지 못하여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어머니의 노력으로 프란치스코 옵세르반티 수도회에 들어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 수도원으로부터 부적격 판정을 받아 입회가 거절되었고, 다시 프란치스코 카푸친 수도회에 들어갔으나 이번에는 정식 수도자가 아닌 평신도 회원(삼회 회원)의 자격으로 들어갔으나, 몇 개월 뒤 이곳에서도 부적격 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두 번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부끄러움에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요셉 성인은 때마침 그의 외삼촌이 원장으로 있었던 그로텔라(Grottella)지방에 있는 프란치스코 콘벤뚜알 수도회로 찾아가게 됩니다.
외삼촌의 도움으로 그는 수도원 건물 한 켠에 있는 작은 창고에서 머물며 충실하게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그의 그런 모습을 본 수도회에서 그를 3회 회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요셉 성인이 22세가 되었을 때 사제 수사가 아닌 평수사가 되겠다는 조건으로 입회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는 수련기간 동안 원장인 삼촌 신부님의 지도를 받으며, 비록 공부에는 재능이 부족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밤늦게까지 촛불 아래에서 공부하며 노력하여 무사히 수련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627년 1월 3일 삭발식을 통하여 정식으로 프란치스코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하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를 전혀 상상하지 못한 곳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집중하지 못하는 산만함뿐만 아니라 어릴 적 병으로 배우지 못하여 지적능력이 부족했었습니다.
그러한 그를 하느님은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드는 유쾌한 방법으로 그가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부제 시험은 라틴어 성경 원문을 암송하고, 뜻을 해석하는 시험이었는데, 시험 당일 시험관 주교님이 시험문제로 펼치신 대목이 요셉 성인이 유일하게 외우고 있었고 평소 좋아했던 루가복음 11장 27절~28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627년 3월 20일 부제로 서품 되어 모두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1년 뒤 두 번째 사제 시험에서 놀랍게도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당시 최종 시험에 5명의 응시자들이 있었고, 시험관으로 들어오신 당시 주교님은 시험에 있어서 매우 깐깐하기로 소문난 분이었습니다.
성인은 마지막 순서로 구술 형식의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앞서 시험을 보았던 4명의 응시자 모두가 우수하여 주교님이 매우 흡족해하시던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성인의 차례가 되었는데, 갑자기 바티칸으로부터 전령이 급히 달려와 시험관 주교님의 교구장 발령 소식을 전하였고, 이 소식에 흥분한 시험관 주교님이 급히 새로 부임할 교구로 가시면서 마지막 수험자였던 성인에게 “앞서 다른 4명의 동료들이 매우 우수하니, 동기인 성인도 훌륭할 것이라며 굳이 시험을 보지 않더라도 통과되었다”라고 말씀하시며 나가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성인은 1628년 3월 28일 사제로 서품 되었습니다.
이 일화로 인하여 요셉 성인은 시험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과 학생들의 주보성인으로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요셉 성인은 하늘을 날으는 비행사들과 우주 비행사, 그리고 여행자들의 주보이기도 한데요, 이유는 그분이 탈혼중에 자주 공중으로 부양하여 "하늘을 나는 수도자"로 불리기 때문입니다.
1630년 10월 4일 처음으로 탈혼(Estasi)을 체험하는데, 미사를 집전하던 중 많은 신자들 앞에서 공중으로 부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체험은 이후에도 자주 계속되었고, 이 외에도 여러 다른 기적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요셉성인은 유명해지게 되었고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보기 위하여 수도원으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군중들은 그를 살아계신 성인처럼 여기기 시작합니다.
결국 교회의 의심을 받게 되어 교황청으로부터 조사를 받게 되지만 프란치스칸 수도자로서 철저하게 회칙을 따르고 교회에 순명하는 그의 모습에 의심할 만한 잘못이 없음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그에게 10년 동안 머물렀던 수도원을 떠나 아씨시로 갈 것을 명령하고 수도원의 격리된 방에서 감시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요셉 성인은 아씨시에서 15년을 머무르게 되는데, 아씨시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공중으로 부양하는 체험을 하게 되고 그를 만나려고 모여드는 신자들은 더욱 많아지게 됩니다.
특히 아씨시에서는 일반인들뿐만이 아니라 고위 성직자, 여러 지방의 군주들, 폴란드의 왕. 등 지위가 높은 인물들까지 그를 방문하여 조언을 구하였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산만하고 말도 어눌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한없이 순수하고 사람의 내면을 깊이 꿰뚫어 보며 올바른 충고를 해주는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1653년 7월 교회는 다시 그를 마르케 지방의 피에트로루비아(Pietrarubbia)라는 외딴 산골에 있는 카푸친 수도회로 보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일체의 외부 접촉이나 서신왕래도 금지되었고 오로지 수도원에서만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누구도 비난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으로부터 분리시켜주신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이 피에트로루비아에 계시다는 소문은 얼마 되지 않아 곧 세인들에게 알려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산골마을에 다시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는 바타칸에서도 미사에 관련하여 특별한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요셉 성인은 계속해서 신자들이 참석하는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도 끝을 맺게 됩니다. 교회는 그에게 또다시 다른 장소로의 이동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 성인은 항상 그랬듯이 교회의 명령에 순명하였습니다.
요셉 성인 - 이번엔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건가요?
주교님 - 신부님, 교회에서 저에게 신부님에게 장소를 알려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요셉 성인 - 제가 가야 할 그 장소에도 하느님이 계시겠지요?
주교님 - 당연합니다, 요셉 신부님
요셉 성인 - 그럼, 맘 편히 갑시다.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당시 발령을 집행하러 온 주교님과의 대화 내용>
요셉 성인은 교회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을 항상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그것은 교회 내부 일부 지도자들의 자신에 대한 의심조차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로텔라(Grotella)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여정은 이후에 아씨시(Assisi), 피에트로루비아(Pietrorubbia), 포솜브로네(Fossombrone)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시모(Osimo)에 이르기까지 긴 여정이었습니다.
오시모로 가는 길에 먼발치에서 로레또(Loreto)의 성가(聖家) 기념성당(Basilica di Santa Casa)을 바라보았을 때의 일화입니다.
-저기 보세요.
-저기 수많은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보세요, 잘 보세요.
그리고는 그도 하늘로 부양하기 시작하여 평원의 아몬드 나무밭까지 날아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기쁨에 넘쳐 노래와 기도를 하였습니다.
7월 9일 그는 오시모의 성 프란치스코 꼰벤뚜알 수도원에 도착하였고,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시편 132편 14절에 나오는 “이는 길이길이 내 안식처”를 외쳤습니다.
비로소 이곳이 주님이 원하셨던 장소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 성인은 오시모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다가 1663년 9월 18일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주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요셉 성인을 빛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앞세우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이에게 하느님의 섭리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셨다는 점입니다.
그는 1767년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하여 시성 되었고, 교황 성 요한 23세는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을 모든 비행사와 우주 비행사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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