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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역사이야기

베드로 성당에서 보는 교회사와 여성 2 (카노사의 마틸다)

by 이탈리아TV 2020. 10. 27.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에서 오른쪽 앞으로 두 번째 기둥에는 1630년대 후반 베르니니가 제자들의 도움으로 완성한 작품으로 군주를 상징하는 지휘봉과 교황관을 들고 있는 그녀의 석상과 그녀의 발 아래쪽에는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사건이 부조로 묘사되어 있는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1077 1 28일의 사건으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입니다.

 

11세기는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을 둘러싸고 황제와 교황 간의 대립이 정점에 올랐던 시기였습니다.

 

클뤼니 수도원 출신으로 검소하고 개혁적인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 임기 초기부터 강력한 개혁과 쇄신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세속의 군주가 관행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성직자 임명권(서임권)을 금지하고, 성직매매금지, 성직자의 독신 규정 강화 등 성직자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세속으로부터 교회를 독립시키려는 조치를 취해나갔습니다.

 

이에 반대한 당시 신성로마 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고 교황에 반기를 들자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황제인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게 됩니다. 파문을 당한 하인리히 4세를 주변 제후국들의 제후들은 모두 그를 외면하고 교황의 편을 들었고, 뜻밖의 불리한 정세에 처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카노사 성으로 교황을 찾아와 용서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카노사의 성주였던 마틸다는 자신의 성으로 교황을 초대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교황을 보호하였습니.

 

황제가 성문 밖에서 엄동설한에 맨발의 누추한 차림으로 꼬박 3일간 용서를 청하였고,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문을 열고 하이리히 4세를 용서하고 파문을 거두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발에 침구하는 하인리히 4세, 오른쪽 옆에 서있는 여인이 카노사의 성주 마틸다이다.

 

그러나 훗날 권력을 강화한 하인리히 4세는 다시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을 폐위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점령하여 결국 그레고리우스 7세는 살레르노로 피신하게 되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마틸다는 황제와 교황 간의 권력다툼이 정점에 달했던 11세기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지방을 다스리던 투스카니 공국에 태어나서 불과 그녀의 나이 6살 때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그녀가 다스리는 투스카니 공국은 지리적으로 황제의  영토와 교황령의 중간지점에 끼여 있는 완충지역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황제에 반대하는 교황파에 가담함으로써, 그녀는 아버지가 죽고 난 후 황제에게 인질로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토스카나 공국의 수장이 된 뒤 그녀는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을 지지하여 당시 교회와 이탈리아를 독일 황제로부터 지켜내었고, 이후의 끊임없는 황제 군의 침입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 자신이 직접 말을 타고 칼을 들어 병사들을 지휘하며 나라를 지켰던 여전사였습니다.

 

그녀는 당시 교황을 지지했던 든든한 후원자였으며, 외세로부터 교회와 이탈리아를 적극적으로 지켰던 이탈리아의 쟌 다르크였습니다.

 

그녀의 사후 카노사성이 파괴되면서 1635년 그녀의 유해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오게 됩니다.

 

동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