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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역사이야기

카라칼라 욕장(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있기를 기도하라)

by 이탈리아TV 2020. 11. 7.

만약 우리가 로마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로마인에게  집에서 샤워는 어떻게 하는지를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요?

 

로마시대에는 현대처럼 일반인들의 가정에까지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일반인들은 일과 후에 공중 목욕장을 들러 몸을 깨끗이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이미 로마 시절부터 로마의 7대 불가사의로 불렸던 카라칼라 욕장의 공식 이름은 안토니니아나 욕장(Thermae Antoninianae)이었습니다.

로마의 공공 목욕장 가운데 306년에 디오클레치아누스 욕장이 지어지기 이전까지 가장 규모가 큰 욕장이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형태가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욕장으로 고고학과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로마시대 유산입니다.

 

 

역사

 

 

이 욕장은 카라칼라 황제에 의하여 212년부터 건축이 시작되어 매일

9천여 명의 인부들이 동원되어 5년 만인 216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욕장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기원전 144년에 건설한 마르치아 수로(Aqua Marcia)에서부터 연결하는 안토니니아나 수로(Aqua Antoniniana)를 새로 건설하여 매일 수만 리터의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욕장의 크기는 약 11헥타르 (33,275)이며 외부 담장의 길이는 400m × 328m, 그리고 목욕탕 건물만 220m × 114m로 목욕탕 건물뿐만 아니라 정원, 체육관, 그리스어와 라틴어 장서들을 열람할 수 있는 도서관 등의 시설이 있었던 복합적인 문화공간이었습니다.

동시에 약 1600명이 입장할 수 있는 규모이고, 매일 약 1만여 명이 목욕장을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입장할 수 있었고, 입장료는 저렴한 동전 한 잎이었으며,(여성은 남성의 두 배를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군인, 노예, 어린이들은 무료로 입장하였습니다.

 

537년 동 고트족이 침입하여 욕장으로 이어지던 수로를 파괴할 때까지 320여 년간 목욕장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2세기부터는 석재와 대리석의 채석장으로 활용되어 피사 카테드랄, 로마 트라스테베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짓는 데 사용하였고, 16세기 교황 바오로 3세때에는 일명 파르네제(Farnese)의 조각작품들이 발굴되어(파르네제의 헤라클레스, 파르네제의 황소, 플로라) 현재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또 각질을 벗기는 운동선수(바티칸 박물관 소장), 2개의 화강암 분수대 수반(현재 로마 파르네제 광장)등이 발굴되었습니다.

왼쪽:피사 카테드랄, 중앙:트라스테베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오른쪽:피렌체 성 삼위일체 광장

1563년 교황 비오 4세는 야외 수영장(Natatio)에서 발굴된 화강암 기둥을 당시 피렌체의 수장인 코시모 메디치 1세에게 선물하여 현재 피렌체 성 삼위일체 광장(Piazza Santa Trinita’)에 세워져 있습니다.

 

1938년에는 로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미트라 신당(페르시아에서 전파된 종교)이 욕장 지하에서 발굴되었고,

1938년부터 매년 여름 시즌에 야외 오페라 및 음악 공연장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는데, 1990년 로마 월드컵 개최 기념

3대 테너 공연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구조와 기능

 

 

출입구

 

욕장 건물은 좌우가 동일한 대칭구조로 설계되어 양쪽에 똑같은 시설들이 있었습니다.

출입구는 북동쪽에 4개의 출입구가 있었고 출입구를 통하여 먼저 탈의실로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탈의실(Apodyterium)

 

벽면에 탈의한 옷을 보관할 수 있는 사각형 벽감이 있었고, 분실을 피하기 위해서는 관리 노예에게 보관료를 따로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탈의실에서 일종의 팬티 종류인 페리조마(Perizoma)로 갈아 입고 욕장에 입장하였습니다.(여성은 오늘날의 비키니와 비슷한 복장)

 

 

 

 

 

 

체육관(Palestra)

 

외쪽: "운동선수" 모자이크 오른쪽: 오푸스 섹틸레 기법으로 장식된 돌판

직사각형 형태(50m × 20m) 2구조로 가운데 천장이 열려있는 형태입니다.

 

욕장으로 들어가기 전 적당한 운동으로 땀을 내던 장소로 로마 목욕문화의 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바닥과 벽은 모자이크와 오푸스 섹틸레(상감) 기법으로 만들어진 돌판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1824년 운동선수(Atleti) 모자이크가 발굴되었는데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운동을 마친 후 앞쪽으로 이어져 있는 라코니움(Laconicum: 사우나)으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온탕(Caldarium)

 

카라칼라 욕장의 온탕부분: 현재는 거대한 2개의 필라스트 기둥과 앞쪽으로 원형건물의 흔적이 남아있다.

남서쪽 중앙에 위치한 지름 34m의 원형의 공간으로 8개의 거대한 필라스트 벽감 기둥(현재는 두 개만 남아 있다)이 둥근 쿠폴라 지붕을 받치고 있는 형태의 구조입니다.

 

필라스트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2층 구조의 거대한 창이 나 있었는데, 창을 통하여 낮 시간 동안 빛을 받아들여 온기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특히 온탕 바닥은 온돌시설이 되어있었는데, 과거 우리나라의 온돌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바닥과 바닥 사이에 뜨거운 열기가 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아궁이에서 들어온 열기가  바닥의 온도를 높여주고 이 열기가 벽과 벽 사이의 빈 공간으로 올라가 굴뚝으로 빠져나가게 하여 바닥과 벽면 전체가  온돌 구조였습니다. 

 

로마 목욕장의 온돌 시스템: 아궁이에서부터 열기가 바닥과 벽사이의 빈 공간으로 흐르게 한 삼중식 온돌구조였다.

 

온탕의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의 수반이 있었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미온탕(Tepidarium)

 

온탕과 바실리카(냉탕) 사이에 위치한 공간으로 면적이 가장 작은 공간입니다.

이곳은 냉탕과 온탕 간의 온도 차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간으로 미지근한 온도의 욕탕입니다.

 

 

바실리카(Basilica) 또는 냉탕(Frigidarium)

 

가장 넓은 공간(58m × 24m)으로 천장은 십자 모양의 3개의 볼트 형태의 지붕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목욕장의 중앙에 위치함으로써 이곳에서 여러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바실리카 형태는 이후에 지어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욕장 (298년 ~ 306년), 포로 로마노에 있는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4세기 초), 그리고  미국 시카고 기차역, 뉴욕시 펜실베이니아 Station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16세기 교황 바오로 3세 때 3세기경 그리스 조각가 글리콘의 작품으로 알려진 일명 파르네제(Farnese)의 헤라클레스 상 그리고 파르네제의 황소 등의 조각 작품들이 이곳에서 발굴되어 현재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 있었던 2개의 화강암 분수대 수반 현재 로마 파르네제 광장(Piazza Farnese)에 장식되어 있습니다.

 

 

노천 수영장(Natatio)

 

바실리카와 같은 크기의 규모이며(58m × 24m) 전체 공간이 지붕이 없는 유일한 공간으로 마치 현대의 야외 수영장과 비슷한 개념의 공간입니다.

 

벽에서 마치 작은 폭포처럼 물이 흘러나왔고, 벽의 니치 부분에는 다양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8개의 화강암 기둥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1563년 교황 비오 4세가 당시 피렌체의 수장인 코시모 메디치 1세에게 선물로 보냈고 현재는 피렌체 성 삼위일체 광장(Piazza Santa Trinita’) 세워져 있습니다.

 

 

지하(Sotteranei)

 

욕장 지하는 2층 구조로 높이 6m, 6m 규모로 마차가 다닐 수 있는 갤러리 형태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지하 1층에는 욕장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여러 시설들이 있었는데, 이곳으로 매일 땔감용 나무를 운반하는 수십 대의 마차가 이동했었습니다.

 

또한 욕장의 물을 덥히고, 내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50개의 화덕(아궁이)이 있었고 이 화덕에 노예들이 쉬지 않고 땔감용 나무를 투입하였습니다.

 

매일 10톤에 달하는 나무장작을 태웠고, 2천 톤의 나무를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들이 지상의 욕장에서 한가로이 목욕을 즐기는 동안 지하에는 수많은 노예들이 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지하 2층은 물을 공급하고 배수하는 시설이 있었던 공간입니다.

 

 

미트라스() 신당(Mitra)

 

1938년도에 지하에서  미트라스교 신당이 발굴되었는데, 현재까지 로마시에서 발굴된 미트라스 신당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신당이며 로마제국 전체에서 발굴된 신당 중에서는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신당입니다.

 

미트라스교는 1세기경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종교로 특히 로마 군인들 사회에서 널리 믿어진 종교이며 태양신인 미트라스를 숭배하며 황소의 피를 재물로 바치는 예식을 행하던 종교입니다.

 

 

 

저수조와 도서관(Biblioteca)

 

물을 저장할 수 있었던 저수조는 남쪽의 경사진 언덕 위에 만들어졌는데  물이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으로 원활하게 흐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카라칼라 욕장에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새로 건설된 안토니니아나 수로(Aqua Antoniniana)가 이 저수조로 연결되어 매일 욕장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였고 저수조는  8만 리터의 물을 보관할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물을 보관하던 저수조 좌우 양쪽 끝부분에는 그리스와 라틴어 문학 도서관이 각각 위치해 있었는데 현재는 오른쪽 도서관만 일부 건물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도서관은 누구나  책을 열람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었는데 스포츠 시설과 함께 고대로마의 욕장 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Orandum est ut sit mens sana in corpore sano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있기를 기도하라

 

1세기 로마의 시인이었던 유베날리스(Decimus Iunius Iuvenalis)가 남긴 유명한 풍자 시의 한 구절입니다.

당시 폭력적인 검투사 경기에 열광하는 로마인들에게 정신적인 수양이 부족함을 한탄하며 경종을 울리기 위해 쓴 풍자 시였습니다만 세월이 흘러 오늘날에는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라는 말로 의미가 변하여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가 죽은 후 100여 년이 지난 뒤에 지어진 카라칼라 욕장에 도서관이 있는 모습을 만약 그가 보았다면 과연 흡족해 했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