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 정면에서 왼쪽 길 건너편에는 일명 "성 계단 성당"이라고 부르는 예수 고난회가 관리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의 정식 이름은 "Chiesa di San Lorenzo in Palatio ad Sancta Sanctorum"인데, 라틴어와 이탈리아어가 섞여있는 이름으로 정작 로마 사람들도 정식 이름을 물어보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말로 의역하면 "지극히 거룩하신 궁전(교황청) 안에 성 로렌조 성당"이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원래의 이름보다 "성 계단 성당"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성당 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본시오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으실 때 세 번이나 오르고 내려오셨다고 전하는 28개의 대리석 계단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성 계단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가 326년에 예루살렘에서 가져와 당시 교황 실베스테르(Silvestro, 314-335) 1세에게 기증하였고, 옛 교황청이었던 라테라노(Laterano)궁에 설치하여 보관하였습니다.
오랜 아비뇽 유수 기간 동안 방치된 라테라노 궁의 남은 일부를 1589년 교황 시스토 5세가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시면서 지금의 성당에 설치하여 다시 순례자들에게 개방하였습니다.
성 계단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하며 이 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 곳에 계단을 설치할 때에도 작업하던 인부들이 (계단을 밟지 않기 위하여) 위에서부터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작업을 했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 수많은 순례객들이 무릎을 꿇고 올라감에 따라 기존의 대리석 계단이 많이 닳고 훼손되자 교황 인노첸시오 13세 (Innocenzo XIII)는 1723년 원래의 대리석 계단을 보호하기 위하여 호두 나무로 덮개를 씌워 대리석의 계단을 보호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3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나무로 된 계단마저도 훼손이 심해져 작년에 다시 이 나무덮개를 교체하는 복원작업을 하였습니다.
이 대리석 계단에는 4군데에 핏자국이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태형을 당하시고 사형선고를 받으시러 계단을 올라가셨던 예수님의 핏자국이라고 합니다.
Sancta Sanctorum(지극히 거룩한 성소)
성 계단을 끝까지 오르고 나면 철창으로 된 창문 너머 "Sancta Sanctorum"이라는 옛 교황님 소성당을 마주 보게 되는데요, 1309년 아비뇽으로 교황청이 옮겨가기 전까지 이 곳이 교황청으로 사용되었던 시절에 교황님을 위한 개인 성당이었습니다.
이 경당에 대하여 언급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교황 스테파노 3세(768-772)의 자서전이며, 교황 호노리오 3세(1216-1227)가 보수공사를 하였고, 교황 니콜라오 3세(1277-1280)는 1278년도에 다시 재건축하였다고 합니다.
제단안에 성유물을 보관했던 공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단위의 라틴어 글자
“Non est in toto sanctior orbe locus” – “온 세상에 이곳보다 더 거룩한 장소는 없다”
Sancta Sanctorum은 라틴어로 “거룩한 것(혹은 장소)들 가운데 가장 거룩한 것”이라는 의미로 고대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 내부에 계약의 궤를 모셔놓았던 가장 거룩한 성소를 의미합니다.
4세기부터 12세기초까지 이 경당 제단안에 예수님과 베드로, 그리고 바오로 성인과 관련된 성유물들을 보관했기 때문입니다.
경당 입구의 청동문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로마시대 때의 4개의 청동문 중에 하나입니다.
입구 맞은편(북쪽) 벽면에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앉아계셨다고 전해지는 나무의자의 일부분이 액자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제단 위에는 “Acheropita”(사람의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님을 의미)라고 부르는 구세주의 얼굴을 표현한 제단화가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가 천사의 도움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6-7세기경의 이콘화로 추정합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후에 만들어진 장식입니다.
창문왼쪽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 가운데에 있는 교황 니콜라오 3세(1278년)가 이 경당을 지어 예수님에게 봉헌하는 장면입니다.
북쪽 벽 창문 오른쪽 프레스코화 : 가난 때문에 세 딸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사랑하는 딸들을 출가시키지 못하고 매춘부로 넘겨야 할 곤경에 처한 아버지에게 니콜라오 성인이 3일간 몰래 창문을 통하여 금이 든 자루를 넣어 주어, 마침내 세 자매 모두 정당하게 혼인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에피소드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바리의 성 니콜라오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아 그 재산으로 평생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이러한 니콜라오 성인의 이야기가 훗날 서양으로 들어와 “산타 클로스”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경당 내부의 프레스코화와 코즈마테스크 바닥장식은 모두 13세기 작품입니다.
16세기까지 성주간과 예수님 승천 축일 전날에 이 성화와 함께 행렬을 했던 전통이 있었습니다.
복자 교황 비오 9세(1845-1878)는 1853년 성당을 복원하고, 예수 고난회를 초대하여 이 성당을 관리하게 하여 현재까지 예수 고난회가 이곳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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