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6일 은퇴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성 보나벤투라의 고향인 바뇨레죠를 사목방문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학자이기도 한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시며 성 보나벤투라와의 특별한 인연을 기억하셨습니다.
젊은 학자 시절 그는 성 보나벤투라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그와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박사학위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성 보나벤투라의 신학사상이 젊은 학자 시절 교황 베네딕도 16세가 성장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회상하셨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1217년 바뇨레죠(Civita di Bagnoregio)에서 의사인 아버지 죠반니 디 피단자(Giovanni di Fidanza)와 어머니 마리아 디 리텔로(Maria di Ritello)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조반니 디 피단자(Giovanni di Fidanza)였습니다.
성 보나벤투라 자신이 회상하는 바에 따르면, 어릴 때 일어난 한 사건이 그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만 1살도 채 되기 전에 그는 큰 병에 걸려서 의사인 아버지마저도 그를 살릴 수 있는 희망을 포기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때마침 바뇨레죠에 방문하셨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의지했고, 아들의 병이 완치된다면 그를 장래에 수도원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곧 조반니는 완치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 보나벤투라(Bona Ventura, 행운이여)”라며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이후에 본인의 이름을 “보나벤투라”(Bonaventura)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17세 때 파리로 유학을 가서 동시대의 위대한 신학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공부했고, 후에 파리대학에서 교수로 가르치며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고, 1257년에는 프란치스코회 총 봉사자(총장)로 선출되어 이 후 17년 동안 헌신과 지혜로 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내부적으로 분열이 심했던 수도회를 쇄신하였고, 이로써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부흥기를 맞게 하여 제2의 프란치스코 수도회 창설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를 작성하였는데, 이는 그가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문서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하고 그분을 실제로 알았던 이들이 들려주는 기억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이를 바탕으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탄탄한 근거를 가진 전기가 탄생하게 되었고, 1263년 피사에서 열린 작은 형제회의 총회는 성 보나벤투라가 쓴 전기를 그 설립자에 관한 가장 충실한 묘사로 인정하면서 이를 프란치스코 성인의 공식 전기로 지정하였습니다.
1273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그를 주교로 서품 하고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는데, 추기경 서임을 알리는 교황사절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수도원 주방에서 하던 설거지를 마치고 담담히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같은 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또한 그에게 분열된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사이의 유대를 다시 견고하게 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제2차 리옹 공의회를 준비하도록 요청하셨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이 임무에 성실하게 헌신했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동료였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공의회가 끝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공의회가 마무리되는 것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1482년 4월 14일 프란치스코회 출신 교황 식스투스 4세에 의해 시성 되었고, 1588년 5월 14일 또 다른 프란체스코회 교황 식스투스 5세에 의해 교회의 박사로 임명되었습니다.
특히 교황 식스투스 5세는 그에게 그의 신학사상은 경건하고 사랑이 흐른다는 의미에서 “세라핌적 박사”라는 호칭을 부여하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프랑스 리옹에 안치되었으나 18세기 말 프랑스혁명 당시 군중들에 의해 성당이 불태워지면서 안타깝게도 그의 유해도 소실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도 1490년 그의 유골을 발굴하여 공식 확인한 기념으로 오른팔 뼈를 바뇨레죠로 옮겨 왔었고 현재 바뇨레죠 주교좌성당 내부 그를 기념하는 경당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바뇨레죠에는 성 보나벤투라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들이 몇 군데 있는데, 우선 바뇨레죠에서 치비타를 관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그가 기도했다고 전하는 동굴이 남아 있습니다.
이 동굴은 고대 에트루리아 인들의 무덤터로 전승에 의하면 성 프란치스코가 이곳에 오셨을 때 머물렀다고 전하는 동굴입니다.
현재 치비타(Civita) 지역에는 그가 태어나서 파리로 공부하러 가시기 전까지 보냈던 그의 생가터가 있습니다.
이 집터에는 1524~1526년경 성인을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졌는데, 1695년 지진으로 파괴된 후 1703년 복원되었다가 다시 1764년도의 지진과 이어진 토양의 침식으로 1826년 바뇨레죠(Bagnoregio)로 완전히 이전하였고, 생가의 석재 일부가 그곳 (새 성 프란치스코 성당) 내부 보나벤투라 경당 안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Ogni creatura è parola di Dio, poiché proclama Dio"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을 선포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 성 보나벤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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