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들은 무엇보다 그리스인들이 간과 한 세 가지에 큰 주의를 기울였다. 그것은 도로와 수로 그리고 지하 수도의 건설이었다.”
이 말은 약 2쳔 년 전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뛰어난 지리학자이며 역사가요 철학자인 스트라본(Strabo, 기원전 63/34 ~ 기원후 24년)이 한 말입니다.
로마인들의 높은 토목 기술 수준을 알 수 있게 하는 분야 중 하나가 바로 도로였으며, 로마인들은 고대의 가장 위대한 도로 건설자였습니다.
실제로 오늘날까지 사용하는 유럽과 지중해 지역의 많은 도로들은 그 기원이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 이탈리아의 국도 1번부터 8번까지의 도로는 모두 로마 시대 때 건설된 도로입니다.
SS 1.(1번 국도) : Via Aurelia(기원전 3세기 중반, 건설자: Gaio Aurelio Cotta)
SS 2.(2번 국도): Via Cassia(기원전 3세기 혹은 기원전 2세기경)
SS 3.(3번 국도): Via Flaminia(기원전 220 – 기원전 219 건설자: Gaio Flaminio Nepote)
SS 4.(4번 국도): Via Salaria(가장 오래된 도로로 추정)
SS 5.(5번 국도): Via Tiburtina Valeria (기원전 286년)
SS 6.(6번 국도): Via Casilina(기원전 4세기)
SS 7.(7번 국도): Via Appia(기원전 312 - 서기 244년 건설자: Appio Claudio Cieco)
SS 8.(8번 국도): 현재 SP 8: Via del Mare : bis Via Ostiense (기원전 7세기)
역사
로마가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이탈리아 반도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던 공화정 시절 이전의 로마 도로들은 교역을 하던 상인들이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던 길이거나 가축들을 이끌고 목초지에서 다른 목초지로 이동하던 길로써 이전부터 형성된 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한 길들은 대부분 포장이 되지 않은 흙 길이었고, 자연 지형에 따라 형성된 도로였기 때문에 환경이나 날씨에 따라 변수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동맹 도시나 새로운 속주들이 늘어나고, 이로써 군대의 이동과 교역, 통신 전달 등이 원할하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체계적인 도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기원전 4세기부터는 새로운 식민지 확장과 동시에 군사 목적의 도로들을 새로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먼 식민지 지역까지 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이로써 군대의 빠른 이동뿐만 아니라 물자 교역과 빠른 서신 전달에도 큰 도움이 되게 됩니다.
이를 토대로 강력한 대제국을 이루고 통치하는데 결정적인 인프라가 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축된 로마의 도로망은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제국의 형성과 안정을 가져왔고, 정치, 군사, 경제적 번영 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사상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서양 역사와 문화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도로의 이름
로마의 도로는 크게 공용도로(pretorie e consolare)와 사설도로(Agrarie)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기원전 1세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살았던 역사가인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최초의 포장도로는 기원전 312년도에 건설된 아피아 가도(via Appia)이며 이때부터 지어진 공용 도로는 모두 도로 건설자의 이름을 붙였다고 전합니다.
그 이전의 공용도로들은 건설자의 이름이 아닌 주로 도로의 목적지 이름(via Labicana, via Nomentana)이나 아니면 길의 용도(via Salaria)에 따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말 봉급(급여)을 뜻하는 영어단어 샐러리(Salary)의 기원이 된 라틴어 살라리움(Salarium,소금)이라는 이름을 붙은 살라리아 길(Via Salaria)은 소금을 운반하기 위하여 만든 도로였으며,
길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역사상 최초의 포장도로인 아피아 가도(Via Appia)는 도로의 건설자인 참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키에쿠스((Appius Claudius Caecus)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규정
도로에 관한 규정도 등장하는데, 도로와 관련한 최초의 규정은 이미 기원전 450년경에 만들어진 로마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할 수 있는 12표법에 등장합니다.
내용을 보면 도로의 너비는 직선 구간에서는 2,1미터 이상, 곡선 구간에서는 4,2미터 이상을 유지하라는 규정이고, 또한 처음으로 도로 사용에 대한 권리와 제한 사항들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도로건설 방법
서기 1세기 경에 살았던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스타티우스(Publius Papinius Statius, 45년 경 - 96년)는 그의 저서에 당시 로마의 건축 기법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로마시대 공용 도로는 세심하게 포장되었고, 말이 달리기 편하도록 경사를 줄였습니다. 또한 모든 길은 지형이 허용하는 한 직선으로 뻗게 하여 최단거리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다리(약 2쳔 여개)를 놓거나 제방을 쌓았고, 산을 깎고, 터널을 뚫기도 했습니다.
우선 새로운 도로의 노선을 정합니다.
이때만소르(Mansor)라고 부르던 측량기사가 그로마(Groma)라는 측량 도구를 사용하였습니다.
노선을 정하고 난 뒤 도로의 폭만큼 땅을 파서 낮은 운하처럼 만들어 줍니다
첫 번째 층(Statumen): 돌과 진흙으로 만든 가장 아래 층.
두 번째 층(Rudus): 깨부순 벽돌, 작은 돌, 모래와 석회를 섞어 다진 층으로 두께는 약 30 센티미터.
세 번째 층(Nucleus): 쇄석(碎石)․모래․석회․화산토로 만든 콘크리트를 30~35센티미터 채워서 굳혔다.
네 번째 층(Summum dorsum o Summa Crusta)에는 이런 하부 구조 위에 현무암과 같은 넓은 석판을 마지막으로
깔았습니다.
그리고 도로는 배수를 위하여 양 옆으로 경사지게 만들어 도로 측면에 있는 배수구를 통하여 물이 흘러내려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약 60센티미터 밖에 파지 않는 오늘날 도로에 비하면 훨씬 내구성이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로의 폭은 전반적으로 대략 4,10 – 4.20 미터 이상이었습니다.
이러한 도로의 폭은 당시 로마군의 주력 부대인 두 마리 말이 이끄는 쌍두마차가 달릴 수 있는 폭을 기준으로 하여 만들었습니다. 이는 말 두 마리의 엉덩이 폭을 기준으로 두고 마차의 폭(1,435mm)을 정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것이 근대 영국에서 증기 기관차를 발명하였을 때 철로 폭의 기준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 폭을 기차 선로의 표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 시대 공용 도로의 표준이었습니다.
공용 도로의 건설은 주로 로마 군단이 맡았습니다.
잘 조직된 도로 시스템
도로에는 일정한 구간마다 밀리아리움(Miliarium)이라는 돌기둥이 있었는데 로마 혹은 가까운 도시에서 부터의 거리를 표시하던 일종의 도로 표지판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훗날 서양에서 사용하는 마일의 기원이 되었는데, 이러한 돌기둥은 서로 1 마일 거리에 배치되었습니다
(1 마일 = 로마 성인의 1000 보에 해당하며 미터로 환산하면 약 1,480m.)
기원전 20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의 허마 포럼(Foro Romano)에 청동으로 장식한 “밀리아리룸 아우레움(Miliarium aureum - 우리말로 황금 이정표)”을 설치하였는데,
청동으로 된 원주에는 바로 이 자리가 공용 도로가 시작하는 출발점이라는 내용과 함께 당시 제국의 주요 도시까지 거리가 상징적으로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즉 로마에서 시작하여 목적지까지 모든 공용도로의 거리를 계산하여 기록함으로써 이때부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는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이렇게 로마에서 시작한 도로들은 로마 성벽을 지나고 나면 도로를 따라 가로수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뿐만 아니라 묘지, 석상, 빌라와 신전들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도로들은 목적지까지 최단 거리로 이동하기 위하여 만든 도로였기 때문에 가능한 직선으로 건설되었고 자연스럽게 이동 구간에 따라 주거지가 아닌 구간이 많았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고속도로와 같은 도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치 오늘날의 고속도로 휴게소와 같은 공간(mansiones- 오늘날 맨션의 어원)도 만들어졌는데,
대략 20 km마다 이러한 시설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설에는 단순한 휴게소 시설 뿐만이 아니라 숙박을 할 수 있는 여관, 말을 돌보고 갈아 타는 장소(mutationes), 그리고 서신 왕래를 빠르게 하기 위한 우체국(cursus)도 만들어 지게 되었습니다.
지도
오늘날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네비를 사용합니다만 로마시대에도 군대나 여행자들에게 공용 도로의 노선과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던 지도가 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지도에는 각 도로의 중요한 정보(거리, 휴게소 위치, 하천, 산, 숲과 같은 주요지형등)들이 표시되어 여행자들에게 가이드 역할을 하였습니다.
현재 유네스코에 기록유산으로 지정된 포이팅거 지도가 그것입니다.
이 지도는 12~13세기 프랑스에서 제작된 로마시대 지도의 사본으로 길이만 약 7미터나 됩니다.
이 지도는 축적이나 형태가 없이 로마를 중심으로 길을 따라 그린 왜곡된 지도이지만 4천여 개의 도시와 산, 강과 바다를 잇는 20만 킬로미터의 도로들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으며, 거리뿐만 아니라 심지어 여행자들이 쉴 수 있는 휴게소까지 표시가 되어 여행자들이 실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 지도의 원본은 기원전 1세기 아그리파에 의해 군사와 무역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며 판테온 근처 아그리파 회랑 벽면에 설치하여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나 카피(복사)해 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다음 2편에는 로마인들이 길의 여왕이라 불렀던 아피아 가도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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