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성당 모습이 어떠신가요?
겨울 어느 날 사진 속의 성당을 직접 보고 마치 예전에 보았던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에 나오는 얼음궁전이 떠올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난 3월 22일은 사진 속 장소가 있는 카스텔페트로소(Castelpetroso)에서 "비비아나"라는 이름의 한 시골처녀에게
1888년 고통의 성모 마리아가 처음 발현하셨던 발현 기념 축일이었습니다.
이 성지는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내륙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몰리세(Molise) 주 이세르니아(Isernis) 현 카스텔페트로소(Castelpetroso)이며 인구 약 1600여 명이 사는 작은 도시에 있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발현 성지입니다.
사진 속 고통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가 발현하신 장소에서 아래쪽으로 조금 떨어진
파탈레키아 산(Monte Patalecchia-해발 1399 m) 중턱 해발 827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고통의 성모 마리아”가 1888년 3월 22일 비비아나(Bibiana-이하 비비아나)로 불리던 파비아나 치키노(Fabiana Cicchino)와 세라피나 발렌티노(Serafina Valentino)라는 두 명의 시골 처녀들에게 발현하셨습니다.
현재 이 성지는 캄포바쏘-보이아노(Campobasso-Boiano) 교구 관할이며 프랑스 루르드 성모 성지처럼 시골처녀에게 발현하셨고, 기적의 샘이 솟았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이탈리아의 작은 루르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첫 발현
1888년 3월 22일 당시 체사 트라 산티(“Cesa tra Santi” - 우리말로는 성인들 사이에 있는 나무 없이 풀만 자라는 작은 땅을 의미하며 발현지는 파탈레키아 산 중턱 해발 약 1000미터 지점)라고 불렀던 들판에서
비비아나와 세라피나는 평소처럼 농사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풀을 먹이기 위하여 두 마리 양도 데려왔었는데, 일하던 중 자신들의 양 한 마리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고,
즉시 비비아나와 세라피나는 각자 길을 나누어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후 비비아나는 근처 작은 바위 안쪽에서 평소와는 다른 특이한 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녀는 호기심에 빛이 있는 바위 쪽으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곳에서 돌아가신 아들 예수님과 함께 계신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하였습니다.
놀란 비비아나는 즉시 소리쳐 세라피나를 불렀으나 그곳에 세라피나가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성모님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 비비아나가 목격한 성모님의 모습은 돌아가신 아들 예수님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고, 양 팔은 벌려 마치 돌아가신 아들 예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에게 봉헌하시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발현은 비비아나에게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두 번째 발현
10일 후 같은 장소에서 두 번째 발현이 있었는데, 1988년 4월 1일은 당시 부활절이었고,
두 번째 발현 때는 세라피나도 첫 번째와 같은 모습의 성모님 발현을 목격하게 됩니다.
두 번째 발현 후 소문은 매우 빠르게 퍼져 나가게 되었고, 곧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한 많은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모습으로 발현하셨는데,
성모님의 발현은 1950년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팔미에리 주교에게 발현
이곳의 성모님 발현이 다른 여러 성모 발현지와 다른 특별한 점은 교회의 고위 성직자인 주교님에게 발현하셨다는
점입니다.
이곳에서의 성모 발현 소식은 당시 바티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는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당시 교황 레오 13세는 마침 주교회의 참석차 로마에 머물던 관할 교구(당시에는 Boiano 교구)의 교구장이었던
프란치스코 마카로네 팔미에리(Mons, Francesco Macarone Palmieri) 주교를 불러
직접 조사하여 보고해 줄 것을 당부하셨고,
이에 팔미에리 주교는 조사를 수행하기 위하여 같은 해 9월 26일 직접 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조사를 진행하던 중 성모님이 발현하셨던 바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후 자신의 눈으로 직접(먼저 두 처녀에게 발현하신 모습과 같은 모습의) 성모님 발현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팔미에리 주교는 교황님에게 보낸 서신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저는 아무것도 보질 못하였으나 바위 앞에 무릎을 꿇어 조용히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얼마 후 돌아가신 예수님과 함께 계신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기적의 샘
같은 해 7월 평소처럼 이곳을 방문해 기도를 바치던 비비아나는 어느 순간 갈증을 느꼈고, 이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성모님이 발현하신 장소 가까이에 평소에 보지 못했던 물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에 갈증을 느꼈던 그녀가 손으로 물이 나오는 곳을 파기 시작하자 샘이 솟아올랐고
그녀는 샘의 물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이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이곳을 기적의 샘으로 여기기 시작하였고
샘을 파서 물을 마시고, 가져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첫 번째 기적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실제로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곳의 성모 발현 소식은 시칠리아의 한 지역 신문을 통하여 기사화되었고, 이 기사를 우연히 보았던
볼로냐의 카를로 아쿠아데르니(Carlo Acquaderni)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당시 볼로냐에서 “마리아의 종”(Il Servo di Maria)이라는 월간지를 출판하던 출판사 사장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당시 12살 난 아우구스토(Augusto Acquaderni)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죽음의 병으로 여기던 골 결핵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카를로는 1988년 11월 아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하여 아들의 치유를 구하는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 아우구스토에게 기적의 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게 했고,
물을 마신 아우구스토는 즉시 병이 치유되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를 진료했던 의료진들로부터
그의 병이 완전히 치유되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첫 번째 치유의 기적으로 기록되었으며, 이후에도 수많은 기적들이 보고되었고,
이러한 기적들과 회개는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증언되고 있습니다.
순례 행렬
1888년 3월 22일 이후 이곳을 순례하는 수많은 순례자들의 행령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일반 순례자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많은 고위 성직자들도 이곳을 순례하였는데,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은 교황이 되기 전 1997년 6월 18일 당시 신앙 교리성 장관 시절 이곳을 순례하셨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1995년 3월 19일 이곳을 공식 방문하시어 순례하셨습니다.
2011년 9월 25일에는 이탈리아 주교회의 의장이셨던 바냐스코 추기경이 방문하였고,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5년 7월 5일 방문하시어 22만 명의 신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기념 성당 건립
카를로는 아들이 받은 치유 은사에 대한 보답으로 이곳을 기념하는 최초의 기념 성당을 건립할 계획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1890년 9월 28일 새 성전 건립의 첫 주춧돌을 놓는 미사와 함께 성전 건립이 시작되어
85년 후인 1975년 9월 21일 새 성전이 축성되었습니다.
설계자는 볼로냐 출신의 건축가 프란치스코 과란디(Francesco Gualandi)입니다.
그의 설계는 1889년 브룩셀 국제 건축대전에서 우승한 프로젝트입니다.
신 고딕 양식으로 이곳 몰리세 주 안에서는 이전에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독특한 스타일이며, 당시로서는
시골 산골이었던 이곳에 이러한 독특한 스타일의 성당이 세워지면서 혹자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곳의 산 그리고 주변의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1973년 복자 교황 바오로 6세는 이곳에서 발현하신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몰리세 주의 주보성인으로
공식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2013년 9월 21일 성전은 바실리카 미노레(Basilica Minore)로 승격되었습니다.
내부는 52미터 높이의 중앙 돔을 중심으로 7개의 제단으로 둘러싸인 중앙 집중식 양식이며,
성모님의 7고(七苦)를 상징하는 7개의 제단이 있는 경당들이 있습니다.
성당 건축에 사용된 석재는 모두 이 지역의 석재이며, 건축에 필요한 재원은 지역 신자들의 봉헌과 노력으로
마련되었습니다.
특히 1950년대부터 가난했던 이 지역의 주민들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대거 이민을 가기
시작했는데, 당시 고향을 떠나기 전 이곳으로 와서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 삶의 터전을 잡고 난 후 그들은 성모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후원금을 보내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인 성금으로 고통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완성될 수 있었고, 성당이 완성되기까지 무려 85년의 세월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이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성모 칠고의 길(Via Matris)
1947년 9월 27일 조성된 도보 순례길로써 대성당에서부터 발현지까지 약 750미터 구간의 오르막 길입니다.
마치 십자가의 길처럼 성모 칠고를 묵상할 수 있도록 일곱 개의 기념비와 청동으로 만들어진 기념상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고통의 성모 마리아 신심은 가톨릭의 아주 오래된 대중적인 신심입니다.
중세 때부터 일부 수도원을 중심으로 시메온의 예언을 근거로 하여 마리아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서 겪으셨던
일곱 가지 고통(칠고)을 기념하는 전례가 시작되었고, 17세기부터는 대중화되었습니다.
그리고 1814년 비오 7세 교황에 의하여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축일”이 전 교회의 축일로 제정되었습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축일은 9월 14일 “그리스도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날인 9월 15일을 축일로 보내는데,
이는 십자가 현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의 상징이며 영원한 생명의 나무임이 드러나며,
다음날의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통해 마리아가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모든 신자들의 모범으로 찬미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의 성미술에서는 고통의 성모님이 서양에서의 상복을 의미하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카스텔페트로소에서 고통의 성모님은 발현 당시 검은색이 아닌 푸른색과 붉은색의 옷을 입으신 일상의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이 세상의 눈으로는 고통과 슬픔의 순간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인류의 죄를 대신 보속 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인류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부활의 기쁨을 맞이하시는 하느님의 어머니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통과 죽음의 슬픔에 머물지 말고 곧 맞이하게 될 그리스도의 부활에 초대하시며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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